남구 구만산길 34 조선 선조 때 남강정의 주인 양심당 이시원(1428~1488)과 동생 청심당 이조원(1433~1510)이 함께 그의 아버지 필문 이선제(1390~1453)를 위해 지었다. 문인들과 예를 익히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한 곳이다. 1610년(만력38년 경술 2. 20) 포충사제위답여납명문에는 유등곡리(柳等谷里)
동구 계림1동 (옛 경양방죽 인근)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경양방죽, 이 호수에 있었던 경호정景湖亭, 경호대景湖臺, 경호루景湖樓 등 세 정자를 가리켜 경양모정이라 한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광주목사 김선(金銑, 1750~1837)이 경양호 풍치를 관망하기 위해 1804년 전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거병한 후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인지, 광주 북촌 출신인지 궁금하다.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삼국유사 권2', '후백제와 견훤조'에 실려 전하는 견훤의 출생 설화 때문이다."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 마을에 살고 있었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1038-4담양의 척서정은 2004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됐다. 척서정은 영천이씨대치문중종회에서 관리하는 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마을 한가운데 넓은 대지에 있다. 정자나무와 함께 마을 광장 역할을 하는 장소에 세워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정자이다. 주민들의 휴식처뿐만 아니라 마을
남구 주월동광주읍지와 조선환여승람에 이 정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남구 주월동에 가헌稼軒 김판석金判錫이 창건했고 후석 오준선의 찬기가 있다[在州西 珠月里 金判錫所搆 有原韻 後石 吳駿善 撰記]고 하였다.김판석은 참봉, 도정 등의 벼슬에 재임했다고 하나 실직이 아닌 수직(추천)을 받은 명예직으로 보인다. 가헌은
심의종沈宜鍾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순절한 이백춘(1537∼1592)은 병사 이종우(李從愚)의 증손이다. 자는 영경(榮卿), 본관은 함평이다.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에서 태어나 1558년 용봉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된 중봉마을(저불)로 이사했다.천성이 강직하고 문학절행(文學節行)이 뛰어난 그는 용봉동으로 옮긴 그해 사마시에 급제
후금(청)과 싸우다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전상의(1575∼1627)는 자는 희원(希元) 또는 환중(桓仲), 본관은 천안으로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그는 광주목 도촌면, 현 남구 사구동에서 아버지 용(蓉)과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서 태어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하여 북구 화암동 239번지 묻혀 있다.그는 어려서부터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
김덕홍(1558∼1592)은 김덕령의 형이다.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덕령과 덕보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는데 효우가 지극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의 뜻을 가지고 어머니께 하직하고 아루 김덕령과 함께 의병을 불러 모
북구 소해로 11 (일곡동)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은 조선 시대 광주목 석제면에 속했고, 호구총수에 일곡촌(一谷村)이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전통적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일신재나 그중에 구한말 일대의 선비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머물렀던 유서 갚은 곳이다. 원풍정(願豊亭)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는 데 집의 청심당 이조원(李調元, 1433~1510)이 건립했다. 현재의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 광산이씨 상서공파의 여재각 옆에 있었다고 한다. 필문 이선제의 셋째아들이다. 아버지의 시묘를 마친 후 그 옆에 다시 이 당을 지어 그의 생활공간으로 활용한 건물이다. 청
광주 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는 1일 이연 광주시 시민안전실장을 초청, ‘뛰어난 창조는 끊임없는 열정으로부터’라는 주제로 문화원 회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가졌다.이 실장은 이날 특강에서 “내 자신의 주변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는 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뛰어난 창조의 첫걸음이다.”면서 “융복합시대에
百里蒼山一日還 백리길 푸른 산을 하루에 돌아오니夢魂仍在水雲間 꿈속의 넋 물과 구름 사이에서 맴도네.斗酒更對神明宰 말(斗)술로 다시 신명한 재상을 대하니爽氣催詩入我班 상쾌한 기운 재촉하여 시를 짓게 하네- 광주읍지,월봉집(月峯集)고부천(高傅川, 1578-1636)의 자는 군섭(君涉)이며